부모님전 상서
비가 추적 추적 내리는 새벽입니다.
지금쯤이면 아버진 술에 취해 귀가하는 아파트 주민들을 상대하느라 밤샘을 하고
계시겠죠.서민 아파트의 경비를 보시니까요…
아버지, 어머니께 편지를 써 본 것이 군 시절이었으니까 꼭 16년만입니다.
아버지께선 정년 퇴직을 하신지 벌써 11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 현장에 계심을
자식인 저는 눈물로 참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아들 정훈이가 12살입니다.전 자식 사랑에 부모님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지요. 없는 박봉을 쪼게 보내다 보니 부모님께 해드릴 물질적 여유가 없음을,그나마
마음으로도 제대로 못해드림을…….
아버진 12살 시절, 할머니가 몸저 누워계셔 소년 가장이 되었습니다.밥하고,빨래하고.
학교 다니고,코흘리개 동생도 돌 보아야하는……,동네에서 소문난 효자이셨습니다.
전 상상도 못할 고생을 하시며 한번도 어긋남 없이 바르게 사신 아버지.
제가 12살 시절엔 그저 철없이 학교 다니고,장난만 치던 그런 개구장이였습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빈집을 전 지키지 못해 날마다 산으로 들로 나가
놀았습니다. 그땐 어머니가 무척이나 원망스러웠습니다.따뜻하게 맞아줄 줄 알고 대문을
활짝 열며 "엄마"하고 소리치면 공허한 메아리뿐이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푼돈이라도
벌어 보시겠다고 일을 나가셨죠. 그때 그 원망을 몹시도 후회합니다.
아버진 회사를 걸어 다니셨습니다. 버스비를 아낀다고…… , 한번은 아버지를 따라
회사에 걸어갔다가 다리가 아파 한참이나 고생했었습니다. 그 길을 아버진 15년을 넘게
걸어 다니셨고, 제가 중1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전거를 장만하셨습니다. 자전거를 산 첫날
전 그 길로 끌고 나가 타고 다니다 넘어져 페달을 망가트리고 말았습니다.어머닌 화가
단단히 나셨지만 아버진 웃으시며 다친데 없냐고 물으셨죠.
어머니, 어머닌 천호동 만석꾼의 딸로 태어나 고생 한번 해보지 않고 그저 농사 짖지
않는 월급쟁이라는 것만 믿고 시집을 오셨습니다. 시집 온 그날부터 시동생을 엎어
키우셨죠. 누님과 같이 말입니다. 평생 한복만을 고집하신 시아버지, 늘 병으로 누워계신
시어머니로 인해 신혼의 달콤함도 한번 없이 그렇게 10년이 흘렀습니다.
결국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야 허리 한번 펴신 어머니.살아보시겠다고 이것저것
굿은 일 마다 않고 하신 어머니, 집한칸 마련하시려고 알뜰살뜰 모으신 돈 큰집 빚보증으로
집계약 며칠 전에 다 날리시고,그래도 당숙들이 오시면 따뜻한 밥 한그릇 내놓으시던
어머니, 어머닌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전 형님으로 인해 어머니에 대한 사랑보단 미움으로 컸습니다.
어린 마음이라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어머닌 누님과 형님,저 이렇게 삼남매를
키우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형님에게로 귀결되었습니다.누님과 전 늘 찬밥 신세였고
숨어 한탄해야만 했습니다.
형님의 집요한 괴롭힘에도 결국 저만 혼나고, 그런 일이 반복되어 결국은 가출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 많은 가출 그리고 하루를 못 넘기는 실패,그때 버릇이
하나 들었지요. 집을 나와 뒷산으로 올라가 새벽이 되도록 별을 보았습니다.별똥별 100개
세고야 내려오곤 했습니다. 아무도 저를 찾는 사람이 없었습니다.비참한 심정으로 집에
들어가면 어머닌 어디서 놀다가 이제 오냐며 혼만 냈습니다.그때 그 감정은 형님이 군대
가고 곧바로 어머니 몰래 휴학을 하고 입영 일자 열흘을 남겨 놓고 말씀 드렸을 때 그때서야
풀렸습니다. 큰아들 군대 간지 일년도 못 되 막내마저 보내야 하는 마음에 어머닌 우셨죠.
형님 갈 때는 보이지 않던 눈물이었습니다.그 순간 모든 것이 눈 녹듯 녹아 내렸습니다.
시간을 꺼꾸로 돌려 제가 중3때 일이었습니다.
1학기 중간고사를 보고 지난 월말 성적보다 떨어졌다며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는 선생님
말씀에 무서워 진학 문제라는 거짓말로 어머니를 모시고 갔습니다.그날 저녁 어머닌
쓰러지셨고, 반년을 병석에 누워계셔야만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성적에 대한 충격으로
그런 줄 알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그러나 어머닌 더욱 병세가 악화 되었고,동네 병원에선
원인도 모르고, 한약이다 뭐다 좋다는건 모두 할려고 식구들은 노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명동성모병원으로 가셔서 그 당시 국내에 별로 없었던 C/T촬영을 했습니다.그것들은
자식들 모르게 조용히 진행되었죠.
여름 방학 하던 날 저는 좋아진 성적표를 들고 집으로 달려갔습니다.누워 계신 어머니께
힘이 될 거라 믿었기에…… 그런데 마루에서 신발을 벗으려고 하는데 안방에서 아버지와
큰할머니의 대화가 들렸습니다. 큰할머니는 귀가 어두워 큰소리로 해야 알아들으셨으니까요.
"어머니 제 아내가 암이랍니다. 얼마 못산데요"하며 우시는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한동안 멍하니 마루에 있다 그 길로 뛰쳐 나갔지요.산으로 올라가
한참을 울었습니다.저녁 무렵 아무일 없듯이 자랑스럽게 성적표를 보여드리니 어머닌
웃기만 하셨습니다.
그 후로 방학 내내 교회나가는 것을 전부터 그토록 반대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을 뒤로
하고 형님과 산으로 들로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다녔습니다.
찢어진 아들의 체육복을 기워주시겠다고 바늘을 손에 쥐여 드리면 이내 눈물로 못함을
아들에게 알리는 어머니. 그 심정을 전 그때 몰랐습니다.그 아픔을……
병원에서 뇌종양이란 병으로 판명되고 의료 기술 실험용으로 수술을 권유 받으신
아버진 그 10%의 확률로는 못하신다고, 돌아 가실 땐 가시더라도 집에서 편하게 보내드려야
한다는 아버지의 고집으로 퇴원하셨고, 회사를 퇴직하시어 퇴직금으로 비용을 만드시고
다행이 아버진 훌륭한 기술자이였기에 다른 직장으로 바로 가셨죠.어린 전 그것이 참 다행
이라고 속으로 위안을 삼았었습니다.
그날부터 아버진 어머니의 병간호에 온 힘을 쏟으셨습니다. 속옷등 온갖 빨래며 살림까지
과거 경험 많으신 아버진 밤샘 작업에도 힘들다 말씀 없이 그렇게 해내셨고,보름마다
충청도 어느 시골에서 유명하다는 약국을 새벽같이 다니셨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 집 장이 변한다고 하시며 변해버린 간장독을 부여잡고 우시던
아버지 결국 집에서 굿까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어머닌 일어나셨습니다.
교회에서 문학의 밤을 하는데 형님은 눈물의 간증으로 어머니의 기적을 알렸고, 모두가
울어야 했습니다.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 얘기 할 때 전 지금 돌이켜보면 분명 그건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승리였습니다.
그 해 겨울 방학 때 전 교회에서 학생회장이 되었습니다. 어머닌 꾸지람보다 떡 한말로
축하해 주셨죠.하나님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못난 아들이 장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 이었죠.
그런 어머니……
제가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집은 강북이면서 학교는 그 유명한 8학군의 한 고등학교로
배정이 되었지요. 처음 보는 으리으리한 집에 사는 친구들 속에 저는 한번도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창피 했으니까요.저 참으로 어리석죠?
본의 아니게 학생회 간부가 되어 설악산으로 수련회를 가야 되는데 참가비가 없어 학교에다
못 간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태도, 결국 일기장에 적혀있는 막노동 나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드리고는 무상으로 갈수 있었습니다. 집에다는 말도 못 꺼내고…… 분명
어머닌 가슴 아파 하셨을 테니까요.
고3이 되어 학원이다, 도서관이다 공부한답시고 설처 될때 결국 허약한 몸을 못이기고
쓰러졌습니다. 아버지, 어머닌 우리집에서 누구도 못 먹어본 한약을 지어 저에게 먹이셨습니다.
그렇게 삐적 말라 군대도 억지로 간 놈이 이젠 비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겨우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교를 입학 하게되어 누님과 형님은 산업 전선을 더욱 힘들게
뛰어 다니셨고, 아버지, 어머니는 학기 때 마다 등록금 만드시느라 이리저리 뛰셨죠. 그 잘난
막내를 위해…… . 방학 때마다 일곱번의 아르바이트는 등록금을 보태는데 보단 저를 위한
곳에 쓴 그런 불효자였습니다.
일학년을 마치고 도망치듯 가버린 군대, 아버지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습니다.주류반입이
금지되어 준비해오신 음식만 먹는데 아버진 소리 없이 나갔다 오시더니 캔콜라를 내미셨죠.
그 속에 소주가 담겨있었습니다.그렇게 자상하신 아버지…… ,휴가 나가면 부담될까봐 휴가증
네장을 반납한 사연은 지금도 제 가슴속에 있습니다.
제대 후 학교 생활에선 그 당시 사회가 민주화 열기로 연일 데모가 끊임없었습니다.
학생회에 가담하여 데모를 주도하고, 수배령이 내려져 허구 헌날 집에 못 들어가면 도서관에서
공부한 줄 아시던 두분. 어쩌다 들어오면 데모하지 말라는 당부에 주제넘게 전 두 분을 설득
하려고 들었습니다. 그때 도피 자금은 아내가 공무원 신분이면서 많이 도와주었답니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것도 부산으로 발령 받으면서요.
사연 있는 취직이었습니다. 저는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집안 형편으론 당장 결혼
할 수 없었고, 아직 형님도 총각이었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지방 생활이었고,그것을 빌미로
부모님과 처가집에 동거를 요청했습니다. 다행이 두 집안이 이해해주셔서 약혼식만 하고 바로
지방 생활을 했습니다.아내는 취직 한지도 모른 상황에서 모든 일이 일주일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반대하셨다면 전 아마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겠죠 지금쯤은.
그때까지도 전 철없는 그런 막내였습니다.가슴 아파하시는 두분을 뒤로하고 부산에서
저와 집사람은 현실을 도피해서 살았으니까요.저만 살겠다고 아둥바둥 살았습니다.철저하게
경제적인 아내 덕에 조그마한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지요 8년 만에……
직장 생활 14년 중 10년을 지방에서 살고 있으며 그간 어머니는 부산에 한번, 안양아파트
입주 때 한번, 그렇게 두번 오셨습니다.부산에는 큰손자 돌 때문이었습니다.고모님과 함께.
한편으론 무척이나 서운하면서도 이해할 수 밖에 없는 현실 - 완전치 못한 어머니 몸과
아직도 경제 일선을 못 떠나신 아버님 - 때문에 가슴만 아픔니다.
저는 96년 여름을 잊지 못 합니다. 8월14일. 많은 일거리를 들고 집으로 퇴근하는 길에
아버지의 뇌출혈 소식을 들었습니다.밤샘 근무를 하시고 아침에 돌아오셔야 되는 아버진
오후까지 소식이 없으셨고, 저녁에 시장 어느 구석에 쓰러져 계신 아버지를 동네 어른이
발견하시곤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반 나절 이상을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구사일생 뇌수술을 마치고 아버진 살아나셨습니다. 밤샘 병간호에서
전 의료기술 보단 아직 아버진 이세상을 저버리지 못한 그런 사연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의지로 일어 나신거죠……
제가 철없어 녹용이 혈압에 나쁘다는 것을 모르고 몇해 전 한약을 지어 드렸습니다.
아버진 좋아하시는 약주도 잠시 끊고 막내가 해준 약이니 정성스레 먹어야 한다며
좋아하신 아버지.이제서야 그걸 알고 못해드리니 혹 아버진 제게 서운하신 것은 아닌지요.
사실 냉동실에 녹용이 몇 년 째 그대로 있음을 말씀 못드립니다.
세상에 법 없이도 사실 두분.
평생을 자식 위해 헌신하시는 두분 사이에 태어난 저는 누구입니까.
위선과 독선과 외양만 신경 쓴 그런 삼류 인생을 살고 있는 막내를 부모님은 정말 훌륭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실은 장진구 같은 놈인데도 불구하고…...
여태 것 가슴에 담은 사연을 누군가에게는 얘기 해야하는 그런 답답한 심정.
그러나 직접 드리지 못하는 저는 불효자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면 요즘 처럼말입니다.그럴때 일수록 아버지,어머니가 그리운 건 그것은
당신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2001. 5. 8
어버이날 막내 올림
비가 추적 추적 내리는 새벽입니다.
지금쯤이면 아버진 술에 취해 귀가하는 아파트 주민들을 상대하느라 밤샘을 하고
계시겠죠.서민 아파트의 경비를 보시니까요…
아버지, 어머니께 편지를 써 본 것이 군 시절이었으니까 꼭 16년만입니다.
아버지께선 정년 퇴직을 하신지 벌써 11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 현장에 계심을
자식인 저는 눈물로 참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아들 정훈이가 12살입니다.전 자식 사랑에 부모님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지요. 없는 박봉을 쪼게 보내다 보니 부모님께 해드릴 물질적 여유가 없음을,그나마
마음으로도 제대로 못해드림을…….
아버진 12살 시절, 할머니가 몸저 누워계셔 소년 가장이 되었습니다.밥하고,빨래하고.
학교 다니고,코흘리개 동생도 돌 보아야하는……,동네에서 소문난 효자이셨습니다.
전 상상도 못할 고생을 하시며 한번도 어긋남 없이 바르게 사신 아버지.
제가 12살 시절엔 그저 철없이 학교 다니고,장난만 치던 그런 개구장이였습니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아무도 없는 빈집을 전 지키지 못해 날마다 산으로 들로 나가
놀았습니다. 그땐 어머니가 무척이나 원망스러웠습니다.따뜻하게 맞아줄 줄 알고 대문을
활짝 열며 "엄마"하고 소리치면 공허한 메아리뿐이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푼돈이라도
벌어 보시겠다고 일을 나가셨죠. 그때 그 원망을 몹시도 후회합니다.
아버진 회사를 걸어 다니셨습니다. 버스비를 아낀다고…… , 한번은 아버지를 따라
회사에 걸어갔다가 다리가 아파 한참이나 고생했었습니다. 그 길을 아버진 15년을 넘게
걸어 다니셨고, 제가 중1이 되어서야 비로소 자전거를 장만하셨습니다. 자전거를 산 첫날
전 그 길로 끌고 나가 타고 다니다 넘어져 페달을 망가트리고 말았습니다.어머닌 화가
단단히 나셨지만 아버진 웃으시며 다친데 없냐고 물으셨죠.
어머니, 어머닌 천호동 만석꾼의 딸로 태어나 고생 한번 해보지 않고 그저 농사 짖지
않는 월급쟁이라는 것만 믿고 시집을 오셨습니다. 시집 온 그날부터 시동생을 엎어
키우셨죠. 누님과 같이 말입니다. 평생 한복만을 고집하신 시아버지, 늘 병으로 누워계신
시어머니로 인해 신혼의 달콤함도 한번 없이 그렇게 10년이 흘렀습니다.
결국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야 허리 한번 펴신 어머니.살아보시겠다고 이것저것
굿은 일 마다 않고 하신 어머니, 집한칸 마련하시려고 알뜰살뜰 모으신 돈 큰집 빚보증으로
집계약 며칠 전에 다 날리시고,그래도 당숙들이 오시면 따뜻한 밥 한그릇 내놓으시던
어머니, 어머닌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전 형님으로 인해 어머니에 대한 사랑보단 미움으로 컸습니다.
어린 마음이라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어머닌 누님과 형님,저 이렇게 삼남매를
키우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형님에게로 귀결되었습니다.누님과 전 늘 찬밥 신세였고
숨어 한탄해야만 했습니다.
형님의 집요한 괴롭힘에도 결국 저만 혼나고, 그런 일이 반복되어 결국은 가출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 많은 가출 그리고 하루를 못 넘기는 실패,그때 버릇이
하나 들었지요. 집을 나와 뒷산으로 올라가 새벽이 되도록 별을 보았습니다.별똥별 100개
세고야 내려오곤 했습니다. 아무도 저를 찾는 사람이 없었습니다.비참한 심정으로 집에
들어가면 어머닌 어디서 놀다가 이제 오냐며 혼만 냈습니다.그때 그 감정은 형님이 군대
가고 곧바로 어머니 몰래 휴학을 하고 입영 일자 열흘을 남겨 놓고 말씀 드렸을 때 그때서야
풀렸습니다. 큰아들 군대 간지 일년도 못 되 막내마저 보내야 하는 마음에 어머닌 우셨죠.
형님 갈 때는 보이지 않던 눈물이었습니다.그 순간 모든 것이 눈 녹듯 녹아 내렸습니다.
시간을 꺼꾸로 돌려 제가 중3때 일이었습니다.
1학기 중간고사를 보고 지난 월말 성적보다 떨어졌다며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는 선생님
말씀에 무서워 진학 문제라는 거짓말로 어머니를 모시고 갔습니다.그날 저녁 어머닌
쓰러지셨고, 반년을 병석에 누워계셔야만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성적에 대한 충격으로
그런 줄 알고 열심히 공부했습니다.그러나 어머닌 더욱 병세가 악화 되었고,동네 병원에선
원인도 모르고, 한약이다 뭐다 좋다는건 모두 할려고 식구들은 노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명동성모병원으로 가셔서 그 당시 국내에 별로 없었던 C/T촬영을 했습니다.그것들은
자식들 모르게 조용히 진행되었죠.
여름 방학 하던 날 저는 좋아진 성적표를 들고 집으로 달려갔습니다.누워 계신 어머니께
힘이 될 거라 믿었기에…… 그런데 마루에서 신발을 벗으려고 하는데 안방에서 아버지와
큰할머니의 대화가 들렸습니다. 큰할머니는 귀가 어두워 큰소리로 해야 알아들으셨으니까요.
"어머니 제 아내가 암이랍니다. 얼마 못산데요"하며 우시는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한동안 멍하니 마루에 있다 그 길로 뛰쳐 나갔지요.산으로 올라가
한참을 울었습니다.저녁 무렵 아무일 없듯이 자랑스럽게 성적표를 보여드리니 어머닌
웃기만 하셨습니다.
그 후로 방학 내내 교회나가는 것을 전부터 그토록 반대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을 뒤로
하고 형님과 산으로 들로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다녔습니다.
찢어진 아들의 체육복을 기워주시겠다고 바늘을 손에 쥐여 드리면 이내 눈물로 못함을
아들에게 알리는 어머니. 그 심정을 전 그때 몰랐습니다.그 아픔을……
병원에서 뇌종양이란 병으로 판명되고 의료 기술 실험용으로 수술을 권유 받으신
아버진 그 10%의 확률로는 못하신다고, 돌아 가실 땐 가시더라도 집에서 편하게 보내드려야
한다는 아버지의 고집으로 퇴원하셨고, 회사를 퇴직하시어 퇴직금으로 비용을 만드시고
다행이 아버진 훌륭한 기술자이였기에 다른 직장으로 바로 가셨죠.어린 전 그것이 참 다행
이라고 속으로 위안을 삼았었습니다.
그날부터 아버진 어머니의 병간호에 온 힘을 쏟으셨습니다. 속옷등 온갖 빨래며 살림까지
과거 경험 많으신 아버진 밤샘 작업에도 힘들다 말씀 없이 그렇게 해내셨고,보름마다
충청도 어느 시골에서 유명하다는 약국을 새벽같이 다니셨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 집 장이 변한다고 하시며 변해버린 간장독을 부여잡고 우시던
아버지 결국 집에서 굿까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어머닌 일어나셨습니다.
교회에서 문학의 밤을 하는데 형님은 눈물의 간증으로 어머니의 기적을 알렸고, 모두가
울어야 했습니다.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 얘기 할 때 전 지금 돌이켜보면 분명 그건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승리였습니다.
그 해 겨울 방학 때 전 교회에서 학생회장이 되었습니다. 어머닌 꾸지람보다 떡 한말로
축하해 주셨죠.하나님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못난 아들이 장이 되었다는 사실 때문 이었죠.
그런 어머니……
제가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집은 강북이면서 학교는 그 유명한 8학군의 한 고등학교로
배정이 되었지요. 처음 보는 으리으리한 집에 사는 친구들 속에 저는 한번도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창피 했으니까요.저 참으로 어리석죠?
본의 아니게 학생회 간부가 되어 설악산으로 수련회를 가야 되는데 참가비가 없어 학교에다
못 간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태도, 결국 일기장에 적혀있는 막노동 나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드리고는 무상으로 갈수 있었습니다. 집에다는 말도 못 꺼내고…… 분명
어머닌 가슴 아파 하셨을 테니까요.
고3이 되어 학원이다, 도서관이다 공부한답시고 설처 될때 결국 허약한 몸을 못이기고
쓰러졌습니다. 아버지, 어머닌 우리집에서 누구도 못 먹어본 한약을 지어 저에게 먹이셨습니다.
그렇게 삐적 말라 군대도 억지로 간 놈이 이젠 비만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겨우 서울에 있는 어느 대학교를 입학 하게되어 누님과 형님은 산업 전선을 더욱 힘들게
뛰어 다니셨고, 아버지, 어머니는 학기 때 마다 등록금 만드시느라 이리저리 뛰셨죠. 그 잘난
막내를 위해…… . 방학 때마다 일곱번의 아르바이트는 등록금을 보태는데 보단 저를 위한
곳에 쓴 그런 불효자였습니다.
일학년을 마치고 도망치듯 가버린 군대, 아버지 어머니가 면회를 오셨습니다.주류반입이
금지되어 준비해오신 음식만 먹는데 아버진 소리 없이 나갔다 오시더니 캔콜라를 내미셨죠.
그 속에 소주가 담겨있었습니다.그렇게 자상하신 아버지…… ,휴가 나가면 부담될까봐 휴가증
네장을 반납한 사연은 지금도 제 가슴속에 있습니다.
제대 후 학교 생활에선 그 당시 사회가 민주화 열기로 연일 데모가 끊임없었습니다.
학생회에 가담하여 데모를 주도하고, 수배령이 내려져 허구 헌날 집에 못 들어가면 도서관에서
공부한 줄 아시던 두분. 어쩌다 들어오면 데모하지 말라는 당부에 주제넘게 전 두 분을 설득
하려고 들었습니다. 그때 도피 자금은 아내가 공무원 신분이면서 많이 도와주었답니다.
우여곡절 끝에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것도 부산으로 발령 받으면서요.
사연 있는 취직이었습니다. 저는 아내를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집안 형편으론 당장 결혼
할 수 없었고, 아직 형님도 총각이었죠.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지방 생활이었고,그것을 빌미로
부모님과 처가집에 동거를 요청했습니다. 다행이 두 집안이 이해해주셔서 약혼식만 하고 바로
지방 생활을 했습니다.아내는 취직 한지도 모른 상황에서 모든 일이 일주일 만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반대하셨다면 전 아마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겠죠 지금쯤은.
그때까지도 전 철없는 그런 막내였습니다.가슴 아파하시는 두분을 뒤로하고 부산에서
저와 집사람은 현실을 도피해서 살았으니까요.저만 살겠다고 아둥바둥 살았습니다.철저하게
경제적인 아내 덕에 조그마한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지요 8년 만에……
직장 생활 14년 중 10년을 지방에서 살고 있으며 그간 어머니는 부산에 한번, 안양아파트
입주 때 한번, 그렇게 두번 오셨습니다.부산에는 큰손자 돌 때문이었습니다.고모님과 함께.
한편으론 무척이나 서운하면서도 이해할 수 밖에 없는 현실 - 완전치 못한 어머니 몸과
아직도 경제 일선을 못 떠나신 아버님 - 때문에 가슴만 아픔니다.
저는 96년 여름을 잊지 못 합니다. 8월14일. 많은 일거리를 들고 집으로 퇴근하는 길에
아버지의 뇌출혈 소식을 들었습니다.밤샘 근무를 하시고 아침에 돌아오셔야 되는 아버진
오후까지 소식이 없으셨고, 저녁에 시장 어느 구석에 쓰러져 계신 아버지를 동네 어른이
발견하시곤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반 나절 이상을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구사일생 뇌수술을 마치고 아버진 살아나셨습니다. 밤샘 병간호에서
전 의료기술 보단 아직 아버진 이세상을 저버리지 못한 그런 사연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의지로 일어 나신거죠……
제가 철없어 녹용이 혈압에 나쁘다는 것을 모르고 몇해 전 한약을 지어 드렸습니다.
아버진 좋아하시는 약주도 잠시 끊고 막내가 해준 약이니 정성스레 먹어야 한다며
좋아하신 아버지.이제서야 그걸 알고 못해드리니 혹 아버진 제게 서운하신 것은 아닌지요.
사실 냉동실에 녹용이 몇 년 째 그대로 있음을 말씀 못드립니다.
세상에 법 없이도 사실 두분.
평생을 자식 위해 헌신하시는 두분 사이에 태어난 저는 누구입니까.
위선과 독선과 외양만 신경 쓴 그런 삼류 인생을 살고 있는 막내를 부모님은 정말 훌륭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실은 장진구 같은 놈인데도 불구하고…...
여태 것 가슴에 담은 사연을 누군가에게는 얘기 해야하는 그런 답답한 심정.
그러나 직접 드리지 못하는 저는 불효자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면 요즘 처럼말입니다.그럴때 일수록 아버지,어머니가 그리운 건 그것은
당신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2001. 5. 8
어버이날 막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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